이형민1
“응급실 의사들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만, 생명을 붙잡기 위한 일분일초가 자신을 언제든지 법정과 조사실로 끌고 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이제 그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의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현실을 이렇게 전했다.
이 회장이 최근 펴낸 저서 ‘양지바른 응급실에 묻어주오’에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겪은 현실과 한국 응급의료의 구조적 문제, 의료분쟁과 과도한 의료 이용, 응급의학과 의사의 소진에 대한 고민이 담겼다.
404쪽 분량의 책은 이 회장이 25년간 응급의료 현장에서 경험한 사건과 대한응급의학의사회를 창립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현장 보고서다.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라는 표현 뒤에 가려진 병상 부족과 전원 체계의 한계, 사망 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진료한 의사에게 집중되는 사법 위험, 의료진 개인의 희생에 의존해 유지된 안전망의 현실을 다뤘다.
응급환자 진료 책임을 명확히 하는 한국형 EMTALA, 지역 거점병원을 중심으로 한 환자 순환 네트워크, 응급실 과밀화를 줄이기 위한 급성기 클리닉, 야간근무 부담을 나누는 유연한 근무체계 등 정책 대안도 제시했다. 이 회장은 국회와 정부, 의료계가 응급의료 정책을 논의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정책 백서의 성격으로 책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책 제목은 응급실의 현실과 이 회장이 바라는 미래를 함께 담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병원 응급실은 대개 화려한 로비와 병원의 중심에서 밀려나 쪽문이나 뒷문 주변에 자리한다. 그는 그늘진 응급실이 언젠가는 의료진과 환자 모두에게 따뜻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양지바른 응급실’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24일 서울시의사회관 인근에서 기자와 만난 이형민 회장은 필수의료와 응급의료 붕괴의 원인을 수가나 인력 부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의료사고 위험과 법적 책임을 감수하면서도 의료진을 중증·응급의료 현장에 남게 했던 사회적 원동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조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점을 핵심 문제로 꼽았다.
이 회장은 “피해가 발생하거나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법적 해결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사법 만능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법원은 접수된 사건을 판결하지 않을 수 없고, 법정까지 가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 계속 판결대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의료현장의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판결이 나오고, 그 판결이 다시 판례가 되면서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환자의 피해를 외면하거나 의료진의 책임을 면제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
그는 “환자에게 억울한 피해를 감수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의사에게 모든 위험을 떠안으라고 할 수도 없다”며 “지금은 모두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구조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조정 기능이 마비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말로는 응급실 의사가 ‘찐 의사’, 의료분쟁 청구액은 평균 8억원”
응급실 의사들은 중증환자 진료를 포기하거나 응급실을 떠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의료분쟁 위험을 꼽는다. 즉각적인 판단이 필요한 응급의료의 특성상 환자의 사망이나 후유증을 완전히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과가 나쁠 때마다 의료진이 조정과 소송 절차에 놓인다면 의사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은 위험한 환자를 진료하지 않는 것이 된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뛰어들수록 감당해야 할 위험도 함께 커지는 구조다.
이 회장은 응급의학과 의사를 향한 사회적 존중과 의료진이 실제 감당하는 위험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응급실 의사를 좋게 봐주는 사회적 시선은 감사하지만 실제 의료분쟁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결과가 나빠지는 순간 거액의 배상 요구와 민·형사 절차의 대상이 된다”며 “응급실 관련 의료분쟁 조정 청구액을 살펴보면 평균 약 8억원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고 토로했다.
‘양지바른 응급실에 묻어주오’라는 책 제목에는 병원 안에서 응급실이 차지하는 위치와 응급의학과 의사가 느끼는 소외감도 담겼다.
응급실은 24시간 인력과 장비를 유지해야 하지만 투자에 비해 높은 수익을 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많은 병원이 응급실을 건물의 중심이 아닌 측면이나 후면에 배치한다.
이 회장은 “응급실은 투자한 만큼 큰 이익이 남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병원이 쪽문이나 뒷문, 로비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배치하려고 한다”며 “어느 대형병원을 가더라도 화려한 로비 한가운데 응급실이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응급실은 양지바른 공간이 아니라 음지에 가까운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는 응급실을 통해 병원 수익의 3분의 1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야간근무와 의료분쟁, 신체적 소진은 그대로 남아 있다”며 “병원 수익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지만 응급실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병원 뒤편의 그늘에서 밤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이 회장이 책을 집필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무너지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응급의학과가 좋아 이 길을 선택했지만, 일을 시작한 뒤 본래 힘들지 않아도 될 일까지 관행과 제도의 부재 때문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특히,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야간근무가 가져오는 신체적 한계와 마주한다는 것.
이 회장은 “응급실 의사들은 보통 40대 중반쯤 되면 밤에 일할 때 부정맥이 생기기 시작한다”며 “불안감도 생기고 새벽에 몽롱한 상태에서 해야 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모습을 마주하면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고 자존감도 무너진다”며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되는 시기가 다른 직역보다 빨리 찾아온다”고 전했다.
“의사가 행복하게 계속 일하고 싶은 곳, 양지바른 응급실”
이 회장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응급실 문은 열려 있지만 환자를 최종적으로 치료할 병상과 의료진이 없다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응급실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의료진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체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정작 자신의 가족이 응급상황을 맞았을 때 갈 수 있는 응급실은 어디에도 없을 수 있다는 경고다.
이 회장이 말하는 ‘양지바른 응급실’은 화려한 시설이나 대단한 지원이 아니다. 의료진이 불필요한 갈등과 위험에 짓눌리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하게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응급실이다.
‘묻어주오’라는 표현에도 죽음이 아닌, 끝까지 응급의료 현장에 남고 싶다는 바람이 담겼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응급실 의사들이 의료분쟁과 소진에 밀려 현장을 떠나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제가 바라는 것은 아주 단순해요. 행복하게 계속 응급실에서 일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응급실 의료진이 따뜻한 대접을 받고,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힘든 일에서 벗어나는 곳이 제가 생각하는 양지바른 응급실이고, 그런 고민을 담아 책을 만들었어요.”
출처 : 의사신문(http://www.doctorstimes.com)